이용도는 눈물을 달라고 기도했다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기도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였으나 비판력이 탁월한 그는 민족의 독립만이 생의 목표요 삶의 의미로 보았다. 수감생활을 거쳐 신학생이 되어서도 이용도는 신학보다는 신문, 잡지, 정치 서적을 탐독하고 정열가로 알려졌다. 각 방면에 두각을 보였으나 기도가 약해지고 차가워지면서 위기의식을 느꼈다. 눈물을 달라고 기도했다. 주님께서 과연 눈물을 주셨고 드디어 산만한 신앙에서 탈출했다. 이용도가 주일학교를 책임지고 있을 때였다. 학생들이 다투다가 “교장 선생님이 오시면 우실 것이니 싸우지 말자.” 말했다. “내 가르침이 부족하여 아이들이 싸운다.”하여 우는 모습을 몇 번 보았기 때문이다. 눈물과 함께 살아난 것은 기도였다. 자정이나 새벽이나 긴 시간 산 기도를 드렸다. 집에서 자는 것보다 산에서 기도하는 밤이 더 많았다. “죽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도록 전도하는 것이 먹고 자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폐병 3기로 사형선고를 받은 신학생이 생의 첫 부흥집회강사로 초청받았다. 얼어붙은 대동강 상류로 올라가 어두워질 때까지 기도하고 새벽에 또 나가 기도했다. 강동교회 집회 첫날 이용도는 첫 찬송을 부르고 기도한 후 다시 찬송하는 중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울음은 뜨겁게 번져가 회개의 눈물이 되었다. “주여! 나의 죄를, 모두 벌겨 벗기신 후에 전할 말씀을 주시옵소서.” 하늘에 잇닿는 솟구치는 사명감으로 외쳤다. 한 마디에 통곡이요 한 마디마다 감격이었다. 외치다 죽겠다는 소명만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교회는 일주일간 감격에서 감격으로 보냈고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던 환자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용사가 되어 돌아왔다. “바치라. 그저 완전히 바치라. 주님께 완전히 바치기만 하면 주님이 맡아 쓰신다.” 그는 외쳤다. 원산지방 대부흥, 강원도 부흥, 황해도와 평양을 비롯한 전국적인 대 부흥사로 금수강산을 3년간 폭풍적인 부흥시대를 만들었다.
조선교회를 향한 눈물도 한없이 쏟았다. 성결과 이혼하고 세속으로 시집간 1920년대 조선교회를 향해 불처럼 외쳤다. 회개로 성결을 옷 입으라 호소했다. 다시 몸이 극도로 악화되자 예수님께 나아가 호소했다. “피를 주소서. 눈물도 말랐거니와 피는 더욱 말랐나이다. 무기력한 빈혈 환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주사해 주소서. 우리 영혼이 마귀를 격파하게 하소서. 피가 없나이다. 우리에게 눈물이 다 말랐나이다. 눈물만이 원망과 오만의 병균을 죽이는 살균력이 있습니다.” 자기 몸을 훌쩍 넘어 조선 교회가 예수님의 피로 수혈받기를 애걸했다. 그리스도인들의 독기가 눈물로 녹아내려지기를 호소했다. “오! 동포들아 내 피를 마시라. 내 살을 먹으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왔으니 먹고 마시라. 그리고 살아라. 영원히 충실하여라.” 민족을 위해 피를 토하고 죽겠다는 순교자의 각오가 일기에 쓰여 있었다. 그러나 눈물도 피도 없는 조선 교계의 왕자들은 시기하는 무리들과 공모하여 거룩한 종의 발을 꽁꽁 묶어 하늘의 잔칫상을 뒤엎었다. 이단으로 정죄하여(1933) 1999년 3월 감리교 서울연회에서 복권되기까지 66년간 거룩함의 흐름을 차단시켰고 한국교회는 눈물주머니가 막혀 가슴 쳐도 애곡할 줄 모르는(마 11:17) 비정한 사나이가 되었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떨어졌느냐? 그곳에는 의사가 하나도 없느냐? 어찌하여 나의 백성, 나의 딸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일까? 살해된 나의 백성 나의 딸을 생각하면서 내가 낮이나 밤이나 울 수 있도록 누가 나의 머리를 물로 채워주고 나의 두 눈을 눈물샘이 되게 하여 주면 좋으련만!”(렘 8:22-9:1, 표준). 선지자 예레미야의 구슬픈 통곡이 가슴 아리게 파고든다. 주님! 눈물을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