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 -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와 맥켄지 선교사
글·최규 선교사
지난번 글에 우리나라 선교역사는 다른 나라에 없는 너무도 놀 라운 은혜가 많이 있다고 했는데(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성경이 번 역되어 선교사를 기다린 민족) 오늘은 또 다른 은혜를 나누길 원한다.
누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한 존로스 선교사에게 한글을 가르쳐 준 사람은 서상륜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본래 만주와 조선을 오가며 인삼을 팔던 장수꾼이었다. 만주에서 인삼을 팔던 그 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열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 소 식을 듣고 고향친구 몇명이 달려와 그를 현지 선교사가 운영하 는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그곳에서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로 스 선교사였다.
당시 서상륜의 병세는 열이 41에 오를 만큼 매우 위독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던 로스 선 교사는 ‘서상륜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죽음의 문턱까지 이른 그는 결국 병이 완치되면 예수를 믿기로 약속한다. 로스와 그의 처남 매킨타이 어 선교사의 정성어린 치료와 간호로 완쾌되자, 그는 약속대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매 킨타이어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는다. 그는 당장 로스 선교사를 도와 성경번역에 착수했다. 현재 우리가 로스역(譯)성경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 서상륜을 비롯한 여러 한국인 신자들 의 힘이 합쳐져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서상륜은 1882년 10월 6일 영국성서공회로부터 한국 최초의 권서인으로 파송을 받게 되고 다음해인 1883년 10월, 부산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보 급소를 설치하게 된다.
1904년 국내에 입국한 와그너 선교사(Ellasue Wagner)도 로스역 성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 기고 있다. ‘로스 번역이라는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그것은 서씨 번역이라고 부르는 것 이 알맞지 않은가? 로스 목사가 어려운 한국어를 배워서 중국어로 된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실력을 가졌을 것 같지 않다. 합리적 결론은 ‘로스 번역’은 이들 한국 청 년들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한다.’
1883년 서상륜은 이렇게 완성된 성경 100권을 그의 동생 서경조와 함께 지니고 압록강을 넘 어 국내 잠입을 시도했다. 당시 조선왕실은 기독교를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밀입국을 시 도하던 서상륜은 입국 도중 관헌에 발각되고 만다. 구사일생으로 성경 10여권만을 지닌 채 탈 출한 그는 가족의 고향인 황해도 소래로 피신하여 그곳에 정착했다.
소래에 터전을 마련한 서상륜은 곧 만주의 로스에게 연락해 성경 6,000권을 선편으로 전해 받 고, 마을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에 나섰다. 얼마 되지않아 20명의 세례지망자가 생겼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들이 예배할 장소였다. 소래교회가 세워진 것과 비슷한 시기에 입국한 언더우 드(1885년)와 알렌(1884년)은 고종이 기독교에 대한 문호를 개방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무렵 소래교회의 교세는 신도가 약 80여명으로, 58세대가 사는 소래에서 50세대 정도가 기 독교를 믿게된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더 큰 예배당이 필요했다. 이미 마을주민 중 80% 이상 이 기독교를 믿는 소래에서 이제 예배당 증축은 마을 전체의 문제였다. 마을 공동회가 모인 자 리에서 교회건축 문제가 제기됐다. 마을 유지가 선산의 소나무를 베어 건축목재로 제공했으 며, 마을 사람들도 건축위원회를 조직하고 헌금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서상륜 못지않게 큰 역 할을 한 사람이 그의 동생 서경조다. 서경조는 후에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사람 이 되는 인물이다.
소래교회 소식을 접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건축자금을 마련해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서상륜과 마을사람들이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후에 소래 교인들이 교회의 역사를 남기고자 작성했던 대 구면지(大救面誌)에 당시의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렇게 해서 소래교회는 마침내 1895년, 8 칸 기와집으로 거듭나게 됐으며, 그리고 약 1년 뒤, 다시 16칸으로 증축했다. 소래교회가 우리 나라 최초의 교회라는 점도 큰 의미를 지니지만, 이 최초의 교회가 한국의 자생적 토착교회였 다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소래교회는 은혜 가운데 성장하고 있었는데 담임목사가 없어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에 선교 사로 입국한 캐나다 출신의 싱글선교사인 맥켄지 목사를 소래교회 담임으로 청빙하기에 이른 다. 놀라운 것은 평생 버터와 치즈만 먹고 살았던 그는 조선 사람이 되기 위해서 된장과 고추 장만 먹었고 조선사람들의 의복을 걸치며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날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동네를 다니며 전도하다가 과로와 일사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성탄절에 미국에서 가져온 치즈와 설탕 등을 맥켄지 목사에게 보 냈는데 고향생각에 힘이 들까봐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날은 더 많은 된장과 고추장 을 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조선을 사랑했던 맥켄지 목사의 예배에 대한 그의 일기 기록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듣습니다. 우리는 기쁨에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차가운 추위와 눈보라도 마 다하지 않고 하나님께 열심으로 예배하며, 만약 예배 처소에 자리가 없을 때는 밖에서 서서 예 배를 드립니다. 더 이상 앉을 곳이 없어서, 장막 뒤의 여인들은 아이들을 안고 서서 예배를 드립니다. 더욱이 이러한 사람들이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릴 때의 감격은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한편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그 기세가 소래교회가 있는 황해도 장연지역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들은 과감히 장연읍을 습격하여 군기고를 탈취하며 무법천지를 만들었다.
저들의 기세가 날로 충천해지자 각 고을의 남자 중 태반이 동학도가 되었고, 약삭빠른 사람들은 이중생활을 하여 평일에는 동학당에 가담하고 주일에는 교인의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경조가 인도하는 소래교회에서도 때마침 수십 명에서 수백 명으로 신도가 늘어났는데 그 중에는 이같이 이중적인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때 동학군이 서경조와 맥켄지 선교사를 처치하기 위하여 소래교회에 왔는데 서경조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동학군의 우두머리 김원삼을 직접 만나 왜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는 맥켄지 목사와 아무 잘못이 없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지 담판을 지었다. 현장에 있던 많은 동학농민들은 그의 대담성에 놀랐고 김원삼은 ‘소래의 서경조와 맥켄지를 극히 보호하라’고 훈령을 내리고 교회에 헌금까지 하며 퇴거하고 말았는데 그 헌금은 1895년에 교회 재건축에 쓰였다고 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교회사역과 전도에 열심이던 맥켄지는 일사병으로 인해 고열에 고생하다가 정신착란증으로 시달렸고 마침내 그는 34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안타깝게도 맥켄지의 약혼녀 맥컬리는 태평양을 건너 조선으로 오던 도중 이 소식을 듣게 된다. 맥켄지 선교사의 비석 후면에 있는 글은 맥컬리가 썼는데, 그 일부분을 보면 ‘주의 말씀에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가 많다 함이 옳도다. 소래교회는 조선의 처음 열매요. 목사의 몸은 여기서 자도다.’ 이후 그녀는 귀국하지 않고 함경도 원산 지방으로 가서 선교활동을 하게된다.
맥켄지의 죽음은 많은 친구들과 후원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특별히 던칸 맥레 목사는 맥켄지의 영웅적인 믿음과 열정에 깊이 감동을 받아 키드스턴 섬의 등대로 가서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고 ‘조선의 사람들의 나라에서 맥켄지를 대신하러 갈 것’을 결심하였다. 한편 서경조는 캐나다 장로교에 편지를 보내게 된다.
우리는 맥켄지 목사의 친구요 동역자이며 형제이신 여러분께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이 편지를 읽어주시고 또 깊은 관심을 보여주시기를 원합니다. 맥켄지 목사님이 한국에 오신 후, 그분은 황해도 장연의 소래 마을로 내려오셔서 열심히 하나님 아버지의 사업을 하시며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소래 마을은 늘 악한 요소가 많은 곳이었고 축복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제는 맥켄지 목사님의 본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우리와 더 이상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캐나다에 계신 우리 형제들이 우리들에게 선교사를 보내주시리라 믿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래의 한국 그리스도교인들의 이름으로..
서명 : 서경조 / 한국 황해도 장연 소래 마을로부터 1895년 12월 26일
소래교회의 편지는 캐나다장로회 교회들과 여신도들을 감동시켰으며 특별히 메리타임 지역 부인 여성 해외 선교위원회를 움직여서 일파만파의 한국선교의 물결을 일으켰고 이를 통해 수많은 캐나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게 된다.
존 칼빈은 ‘복음은 비와 같이 구름으로부터 우연히 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보내는 도구인 사람의 손으로 전달된다.’ 고 하였다.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께서는 헌신된 그 한 사람을 통해 지금도 여전히 그 분의 구속의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