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음서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를 사복음서라 부른다. 이 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들을 몇 구절씩 뽑아 만든 것이 제 5복음서 혹은 “내가 복음서”라고 아르헨티나 후안 오르티즈 목사는 “제자”란 책에서 지적했다. 예를 들면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느니라(눅 12:32)”는 위로의 말씀은 “내가 복음서”에 들어있다. 따라서 이 말씀 을 중심한 설교를 많이 듣고 또 하기를 좋아한다. 반면에 바로 그 다음절 33절 “너희 소유를 다 팔아 구제하라.”는 말씀은 내가 복음서에서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좀처럼 선포되지 않 는다. 복종하기 싫은 말씀이다. 신랑이 주례자에게 “목사님 저는 이 여자를 저희 요리사로 혹 은 접시닦이로 받아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격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통해 구원과 영생을 얻는 구세주로만 받아들이지 왕(王)되신 총체적인 주(主)님을 받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헌금시간에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찬송 부르며 예물을 바친다. 그러나 교 회가 다 써버린다. 주께서 사용하실 기회를 드리지 않는다. 당치도 않는 이론을 붙여가며 자 기들 편리를 위해 돈 쓰면서 주를 위해 사용했다고 자부한다. 주께 조금이라도 기회를 드려보 라. 구제와 선교를 위해 주님은 재빨리 쓰실 것이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 다.”란 감격으로 성직가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교회 직분을 맡는다. 그러나 주님께서 진정으로 흘리며 순교까지 각오하겠노라고 하여 장내를 숙연케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진정으로 가라고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실 찰라 “골라 골라 가오리다” 자기가 선택을 한다. 자기 진보적인 장래 를 위해, 효과적인 자녀교육을 위해 주님 뜻을 귀 막아 버린다. 송장이 비단 옷을 입겠다는 것이다. 내가 복음서에만 양육된 체질인지라 헌신된 인간이라 하면서도 제 몫을 포기하지 않 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왕이라 하면서도 주(主)라 부르면서도 어명을 기다리지 않고 경솔한 짓을 한다. 종놈들이 판을 친다. 장로 권리 찾으려 하고 목사 권위 세우려 하고 선교사 인간 자아 살리려 한다. 왕궁 어전에서 몹쓸 짓을 한다. 소란을 떤다. 죽으려 오신 예수님의 자태, 섬기려 오신 겸손의 덕은 수도원에 가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죄짐이 벗겨 질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나”구조가 무너져 내리는 핵폭발을 경험해야 한다. “그리스도 구조”로 대체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세계적인 부흥을 했고, 한국 선교사가 서양 선 교사를 능가하는 훌륭한 업적을 짧은 선교 역사에도 톡톡히 남긴 것은 부정 못한다. 그럼에도 왜 한국 크리스천이 이 민족 앞에 존경을 받지 못하고 한국 선교사가 현지인들에게 비판을 받 아야 하는가? 혈기싸움에서 지지 않으려 하고 하나님도 이기려는 황소고집 때문 아닌가? 바 울은 “날마다 죽노라”했는데 죽었다 살았다 한다. 어느 날은 죽고 어느 날은 살아서 돌아다니 며 잡된 소리를 내곤 한다. 이 상태라면 큰 일 날 것 같다. 세계 각지에서 한국 선교사 추방 운동이 벌어질 것 같다.
자아를 증발시키자.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껍질만 가지고 지구에 내려 오셨다.(빌 2:7) 교황의 알현을 청한 성 프랜시스에게 교황은 경멸하는 태도로 “로마 성에 가서 변소 청소나 하라”고 신부에게 전했단다. 프랜시스는 중간에서 전해주는 신부의 전갈을 받고 “예”하고 가 서 로마의 집들을 찾아다니면서 화장실 청소를 했다고 한다. 악마 같은 교황의 말에 성자는 복종했다. 자기 신앙인격, 자기 교양 때문에 복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내가 복음서” 를 불태우자. 왕명을 기다라는 충복된 신하가 되자. “어명이요”하면서 서약이라도 꿀꺽꿀꺽 받 아 마신 옛 충신들을 배우자.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