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용 목사 교회용 목사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얼마 전 ‘농어촌 성장 연구회’에 오신 강사 한 분이 자신이 ‘강단용 목사’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자성의 소리를 외침으로 모들들 크게 자극 받은 일이 이었다. 강단에서는 사랑을 외치나 자기는 화를 자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강단에서는 전도하라 하지만 자기는 전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목사 부인이 설교하는 자기 남편 목사가 있는 강단으로 이불을 들고 가서 ‘여기 서 살자’고 했더라는 실담이 있다. 강단에서는 사랑과 희생을 역설하면서도 가정에서는 폭군이 되었던 것 같다. 외식이 관습화 된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도 여기에 해당한 다. “저희 말하는 바는 들어도 행위는 본 받지 말라” 그들은 강단용에 불과한 지도자들이었다. 한편 교회용 신자도 수두룩하다. 한 외국 기독교 지도자가 한국 교회를 둘러 본 후 출국하는 자리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논평을 원했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교회에는 신자가 가득한 데 길거리에는 하나도 없더라”라는 일침을 주고 떠났다. 속여 팔려는 장사꾼, 친절치 못한 표 정들, 지저분한 거리들이 천국 백성이 살고 있는 도시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수대교의 붕괴는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점에서 한국 전체가 붕괴되는 처참한 모습의 한 예였다. ‘진실하게 살자’는 외침에 예배당 유리창이 흔들릴 정도로 ‘아멘’했던 교회당 사람들도 함께 끼어 이런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교회당 안에서만 강한 자들인가? 교회용으로만 제조된 장식용 제품들인가? 선교사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본 현 지인들이 ‘우리에게 화해의 복음 전하기 전에 당신들끼리 먼저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질책하는 현상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이 어찌된 일일까?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 수님의 말씀으로 설교한 목사가 예배 끝난 후 그날 밤 화를 못 이겨 헐떡거리며 싸웠다는 말 과 행동의 거리는 멀고도 험한가 보다. 입술만 떼어 천당 보낼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
예수님은 일찍이 신앙 지침을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가 면을 벗자. 가식은 탄로가 난다. 가장 행렬은 날마다 하는 것이 아니다. 혹 필요할 때가 있을 지는 모르겠다. 나다나엘을 보신 예수님은 감탄하신 나머지 지상에 오셔서 최초의 칭찬을 아 끼지 않으셨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2:47) 전천후 전투기란 것이 있다. 잔잔한 하늘이든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이든 상관없이 그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하는 고성능 전투용 비행기이다. 강단과 교회 그리고 생활 터전을 구별않고 그 감화력을 발산하는 전천후 그리스도인이 오늘에 요구된다. 진짜 예수꾼의 나타나기가 기다려 진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