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또 다른 이름은 무엇인가?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사랑의 원자탄 하면 으레 손양원 목사를 생각한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로, 아모스를 정의의, 호세아를 사랑의, 엘리야를 불의 선지자로 부른다. 충성된 부부되기를 소망할 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경건한 가정을 소개할 때는 고넬료 가정을, 애국 여성을 강조할 때는 에스더를, 이스라엘 제일의 믿음을 추켜 올릴 때는 백부장의 믿음을 서슴없이 소개한다. 현명한 왕이 등극하면 다윗의 길을 좇는다 찬사를 울리고, 악한 왕들의 횡포를 목격할 때는 아합 집의 행위를 본 받는다고 한탄을 한다. 손님 대접 잘하는 집을 마르다의 집이라 하고 비전을 가지라 할 때는 요셉의 꿈을 실례로 든다. 참으로 아름답고 찬란한 이름을 목에 건 수없는 사람들이 성경 안에 하늘의 별들처럼 빛나고 있다. 반면 악한 별명을 가진 사람도 많은 것이 세상 현실이다.
양다리 걸치기 신앙인에게는 유두고같이 될까 두렵다 염려하고, 의심 많은 사람은 도마라고 말한다. 미지근한 교회를 라오디게아 교회라 부르고, 불충 할때는 악하고 게으른 자라고 책망을 호되게 한다. 배신자를 가룟 유다라 부르고, 탐욕 품고 주의 재물을 훔친 자를 아간이라 질책한다.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왕상 13:26) 들이 옛날이나 오늘이나 충성자의 수보다 오히려 몇 배 많은 안타까운 모습들이다. 한국여성 54%가 자기 이름에 불만을 가진다고 한다. 따라서 가명이나 예명을 지어 가진다. 특히 예술인들은 더욱 그렇다. 성까지 바꿔 전혀 다른 가문의 사람처럼 거침없이 예명으로 출세하려고 한다. 유명인사들은 아호를 쓰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의 이름도 바꾸어야만 될 오명(汚名)이 되었는지 모른다. 도약을 위해서 개명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은 작명도 잘하시지만(예수, 요한 등) 개명도 하시는 분이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고쳐 열국의 아비로, 사래를 사라로 부르도록 하시며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징표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개칭하셨고, 반석이 되도록 계획 품으신 예수님은 시몬에게 베드로란 새 이름을 지어 하사 하셨다.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 리빙스톤 다음에 쓰여질 이름을 공모하신다. 노예 해방자 링컨의 첫 이름이 기록되고 둘째 셋째 명단이 비어 있다. 영혼 해방의 구령 일꾼들이 적혀질 것이다. 인도의 성자 선다싱을 닮은 수도사적인 경건한 사도들이 등장하여 기록되어져야만 한다. 맨발의 성자 프랜시스 후열에 설 청빈을 사랑하는 크리스천들의 명단이 이어져야 한다. “바울 같은 선교사”의 별명 같기를 원하신 하나님은 그 공간을 특별히 폭 넓게 확보해 놓으셨다.
모두 바울 같은 선교사로! 하나님이 지어 주신 나의 이름이 궁금하다. 무엇일까? 아브라함을 “나의 벗”(사 41:8),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행 13:22) 이라 하신 하나님은 “간사함이 없는 나다나엘”(요 1:47)같다 하실까? 그 반대의 노한 얼굴이실까?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 그대로를 사람들이 부를 수 있는 그런 이름을 주시옵소서. 그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오! 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