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다윗의 용맹과 무관한 관용을 선교 자세로
이동휘 목사
다윗을 선지자라 부른다(행 2:30). 일생 전쟁터에서 굵은 군인이요, 왕권을 쥔 제왕인데도 성군(聖君)으로 추앙된다. 예수님 당시 군중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반면 다윗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며 오심을 사모한 예언자였다. 선한 왕들을 일컬을 때 다윗 같다 하시었고(왕상 15:11), 다윗을 선택 하신 후에 내 마음에 합한 자(행 13:22)라 극찬하시었고 신용특급을 받은 자다. 비록 간음과 살인의 추악한 악행을 오점으로 남겼으나 죄에 대한 회개가 신속했고 창자가 끓는 철저한 통곡 모두가 주님의 마음을 흡족케 한 것이다. 다윗을 배우고 싶은 마음 가득하다.
첫째는 그의 용맹성이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그를 이기게 하시니라”(삼하 8:6,14). 자주자주 나오는 문구다. 그에게는 패배가 없었다. 천하무적 골리앗 장수를 누구 하나 맞서지 못해 수모만 당하는 상황이었을 때 오직 물매돌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나가 적을 쓰러뜨렸고 거뜬히 나라를 구출한 구국용사다. 목동시절에는 양을 움키는 사자나 곰의 수염을 잡고 맹수도 쳐 죽인 겁먹을 줄 모르는 자였다. 다윗의 부하들 역시 대단한 맹장들이다. 당시 힘 꽤나 쓴다는 블레셋 장수들을 모조리 꺾어 인접 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는 판도로 바꾸었다. 그 용맹의 원천은 어디서 왔을까? “내가 주를 의지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시 18;29). 지칠 줄 모르는 생명 에너지의 뿌리를 하나님께 두었다. 영적침체에서 오는 탈진상태, 낙담케 하는 흉한소식과 애매한 소리를 짓거리는 훼방꾼들이 건네주는 분통 터지는 험담들, 측근의 오해로 분노가 쌓이고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고 싶은 꼴사나운 사람들, 그리고 원수가 쌓아 올린 모래사막 이 모두를 용사의 자세로 능히 극복해야만 한다. 완력으로나 분노로 더군다나 자포자기로는 문제를 풀지 못한다. 무릎 꿇어라. 막강한 힘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올 것이다. 큰 용사여!(삿 6:12) 주님은 일어나라 하신다. 적을 향해 맹공의 태세를 가지면서도 늠름한 여유를 보여주는 지역사령관이 되어라. 하늘나라는 약골이 없다. 비겁한 자도 없다.
두 번째는 끝없는 관용이다. 목숨 걸고 충성한 것 밖에 없는데도 사울 왕은 삼천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벼룩 수색하듯이 날마다 죽이려 한다. 쫒고 쫒기는 숨 막히는 살육 작전에 다윗은 피 말리는 순간을 살아야 했다. 얼마나 억울했고 기가 막혔을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엔게디 황무지 깊은 굴에 다윗의 일행이 숨어있는 그 시각에 사울 왕이 홀로 급한 볼일로 캄캄한 적진에 들어온 것이다. 다윗의 군사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해하지 말라는 군령을 내린다. 그리고 왕의 옷자락만 칼로 벤다(삼상 24:5). 하길라 산에서도 깊이 잠들고 있는 왕에게 접근했고 죽일 수 있는 기회인데도 창과 물병만 들고 나왔다(삼상 26:11). 일시 감동받은 왕의 입에서 이런 고백을 한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7). 그는 원수를 하나님께 맡겼고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것을 알았다. “나는 사랑하나 저는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하나님의 넓은 가슴을 옮겨온 사람같다. 그 아들 솔로몬 왕에게도 역시 지혜와 더불어 넓은 마음을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