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가 설교자에게
강단은 예수님을 홍보하는 선전장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 하셔야 할 메시지를 택함 받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使者) 즉 주의 종 설교자들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래서 대언자(代言者) 혹은 대리자(代理者)라고도 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의 영광과 권위는 대단하다. 강단은 예수님과 그의 뜻을 전하고 널리 알리는 선전장이라 할 수 있다.
설교자는 예수님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한다.
성경의 중심은 구원자 예수님이시고 사도들의 핵심적인 설교내용은 예수님께서 구주시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구약의 모든 선지자와 족장들을 열거 하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니 믿어야 하고 그분으로만 구원이 있다는 내용으로 가득 하다. 교회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 왔다 갔다 하는 사람, 그날 처음 나온 사람, 진리의 적대자들도 있다. 그러므로 그날 청중 모두를 예수님을 영접 하도록 하는데 까지 초점을 두어야 한다. 집회 때 마다 구원 초청을 해야 하고 그날 우리 교회 왔다가 지옥 가는 사람이 없어야만 한다. 교회는 구원과 희망을 파는 상점이 되어야 한다. 설교 듣고 나가는 성도들이 “목사님 설교를 들으니 예수님은 과연 위대한 분이시군요. 나의 구세주가 되고요”라고 고백해야 한다.
강해설교가 가장 성서적 설교라 생각된다.
본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설교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사복음서에서 강해 설교를 많이 했다. 자연적으로 주일마다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 끊이지 않았다. 강해설교로 순서적으로 해 나가니까 본문에 있는 내용으로 제목을 정하여 전파하면 되므로 제목 설교할 때 다음주일에는 어떤 제목으로 설교할까 하는 짐도 해소 되었다. 또한 본문 자체에 그날 설교할 내용이 다 창고의 보화처럼 서론, 본론, 결론이 저장 되었다는 점이다. 그 내용을 석의 한후 적용 하므로 시대적인 상황을 외면치 않는 역사성을 포함 하는 현실적 설교가 될 수 있다. 또 다른 수확이 있다면 성경명상(큐티)의 힘을 길러 주었다는 점이다. 본문을 큰 틀과 현미경적인 두 시각에서 파악 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었다. 성경의 연관성을 발견 할 수도 있었다. 새벽기도는 성경을 창세기부터 차례로 하루에 한 장씩 읽는 것으로 매일 새벽을 이어 갔다.
본문을 암송 했다.
설교 준비가 다 끝난 후에는 토요일 오후나 저녁까지 내일 설교할 본문을 암송하고 묵상 했다. 여러 번 반복하고 명상하는 가운데 받는 은혜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부사, 형용사, 접속사 그리고 점 하나까지 깊은 의미가 담겨 있고 은혜가 숨겨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일획도 정확무오 함을 실감 하였다. 준비한 노트 속에 쓰여 있는 내용보다 본문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말씀 자체로 내가 먼저 은혜를 받았고 명상하는 가운데 내일 설교 할 수 있는 기쁨과 힘을 얻었다. 본문을 암송 하고 강단에 서기 때문에 쉽게 빠지는 설교의 외도를 피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것만큼은 꼭 강조 하고 싶다.
설교는 설득적 선포이다.
전에는 설교를 선포라고 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선지자들처럼 외치기만 하면 임무완성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반응이 없는 설교는 아무런 열매가 없다 하여 설교는 설득이라 했고 요사이 지혜로운 방법으로 설득적 선포다 라 말 하는 것 같다. 말하는 입장이 아니라 듣는 자의 입장에서 전달방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어느 설교학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아나운서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말하지 말고 웅변가처럼 투사처럼도 하지 말고 배우처럼 쉬운 용어와 감정을 섞어서 감동적인 설교를 하라는 내용 이었다. 대화적이고 친근함으로 다가오는 설득 있는 설교를 하라는 말입니다. 설교는 대화라는 이론도 이런 뜻에서 이해된다.
기도의 무릎이 설교의 성패를 좌우 한다.
설교의 황제 스펄전 목사에게 감동적이고 능력 있는 설교의 비결을 물었다. 그때 그는 자기 교회에서 제일 많이 기도하는 사람보다 네 배를 더 하십시오 라고 대답 했단다. 기도실에서 하나님과 친한 자가 강단에서 청중과 친하다는 말이 있다. 역사를 움직인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아침 일찍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이다. 말은 강하고 유창 하지만 말씀은 약한 설교자가 있는가 하면 말은 바울처럼 시원치 않지만 강단에 오르면 말씀이 능력 있는 자가 있다. 기도의 열매라고 본다. 영어에 낯익은 문구가 있다. ‘No prayer No power, Little prayer Little power, Much prayer Much power!’ 한국교인들이 교회에 가면 잠이 온다는 말을 한다. 설교자는 한 사람도 재우지 말자라는 각오로 강단에 서야 한다. "네 설교에 불을 붙이라. 그렇지 않거든 불속에 던져라"(웨슬리)
설교보다는 설교자가 더 중요 하다
교인들은 첫 해에는 설교를 듣고 다음 해부터는 설교자를 본다는 말이 있다. 뒷문을 막으라는 책도 있다. 목사의 편협적인 인간관계에 실망한 교우들이 교회까지 떠나는 경우를 본다. 교인간의 갈등과 불화로 시작되는 다툼도 목회자가 평소에 존경과 삶의 모본이었다면 영적인 권위로 아름답게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다. 설교가 삶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욱 힘찬 감동을 주는 지도력이 될 것이다. 어느 신학교 출입문에 돋보이게 새긴 글을 보았다. ‘사람이 되어라! 성자가 되어라! 목자가 되어라! 학자가 되어라!’ 경험 많은 인생스승의 성직자에 대한 애절한 교훈이었다고 생각 된다. 가짜목사가 많고 가짜박사가 목사들에게도 많다는 말을 평신도들이 말하고 있다. 목사다운 목사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푸념도 있다
설교준비에 애타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일주일 간 찢긴 심령을 치료하고 낙망과 실의에 빠진 성도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탐욕과 음란과 미움으로 마귀에 덫에 걸린 교인을 성령의 불로 정화 시키고 신앙에 적대적인 사상을 뽑아내려면 명의(名醫)가 되어야 한다. 그날 꼭 답을 주어야 한다. 말씀 준비와 경건의 마음으로 자신을 단속해야하고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데 따른 애타고 힘드는 작업을 회피할수 없다. 잘 요리되지 못한 음식이나 설익은 밥을 먹을 수 없는 것 같이 은혜 없는 설교는 청중으로 화나게 합니다. 하나의 양떼라도 축 나는 일이 없고 실한 양으로 가득 찬 비옥한 목장이 되려면 꼴이 좋아야 합니다. 풍성히 잘 먹이고 훈련 시켜야만 합니다.
감정이 아닌 감동시키는 설교를
강단의 남용을 삼가야 한다. 교인의 버릇을 고치려는 생각, 야단치려는 생각, 섭섭함을 풀려는 생각, 도무지 기초부터 되어있지 않다는 얕잡아 보려는 생각, 목사가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세속적 감정을 강단에서 풀면 안 된다. 예수님의 사랑과 진리로 감동을 주어야 한다. 온유한 심령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날 참석한 사람들로 위로와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서 빛이 되도록 격려해야 한다. 먼저 치료를 받아야 온전해 질수 있다.
성경본문과 제목에 일치하는 핵심적인 내용이어야 한다.
제목과 내용이 전혀 연관 되지 않는 설교를 가끔 듣는다. 핵심을 교우들의 머리에 집중 시켜 설교를 생활에 적용 시켜야 하고 일주일의 양식이 되는 힘이 되어야 한다. 설교제목도 설득력 있는 표제여야 한다. 죄가 무엇인가라는 제목보다는 "죄의 값은 사망이다" "죄를 회개하는 순간 천국입장이 가능 합니다"란 제목이라면 효과가 클것이다.
#첨부:
P(Preacher) 설교자가.............................................Who?
M(Message) 메시지를..............................................What?
A(Audience) 청중에게............................................. Whom?
S(Spirit) 성령의 능력으로 전해서............................How?
T(Transformation) 변화(회심,성화)가 일어나게 하는 것....Why?
# 하나님의 말씀을 전 하기 위해서 선택박고 훈련 받은 그의 종들이 말씀을 선포 하고 해석 하여 삶에 적용하게 하는 것인데 그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high tech시대에 high touch)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인해 가능 하다.